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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한국사

안중근 의사의 생애

by The Reader 2023. 1. 12.
어린 시절

안중근 의사는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아버지 안태훈, 어머니 조마리아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가슴과 배에 7개의 점이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에 응해 태어났다는 뜻으로 응칠이라고 불렸고, 1897년 천주교에 입교하여 프랑스 출신 신부 조제프 빌렐렘(한국명 홍석구)로부터 토마스(도마)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일본에 외교권을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자 국권 회복을 위해 상하이로 떠났으나, 협조를 거절당한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아버지 안태훈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박영효가 주도한 70명의 외국 유학생단에 선발되었으나, 갑신정변이 일어나 유학이 무산되었다.  안태훈은 훗날 의병을 일으켰고, 동학군의 선봉이었던 아기접주 김창수를 숨겨주기도 하였다. 김창수는 이후 이름을 김구로 바꿨다.

 

학교 설립과 의병 가담

1906년 3월, 안중근은 대동강 하류, 진남포로 갔다.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은 안중근은 삼흥학교를 설립하여 후세 양성에 힘썼다. 그 후 천주교 계열 학교 남포 돈의학교를 인수하여 자신도 선생님이 되어 가르치는 등 생도들의 교육에 최선을 다했다. 안중근은 국력을 키우려면 크게 4가지에 힘을 써야 한다고 했다. 이는 교육의 발달, 사회의 확장, 민심의 화합, 그리고 실력 양성이다.
1907년 안중근은 독립 전쟁 준비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연해주로 건너가 의병에 가담했다. 의병활동 중 안중근은 일본 포로들을 잡고 의병 동지들과 의견 충돌을 한 적이 있었다. 다른 의병들은 포로를 풀어주게 되면 자신들의 위치나 정보가 노출되어 위험에 처할 수 있으므로 포로들을 사살하자고 주장하였으나, 안중근은 만국 공법에 따라 포로 대접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들을 사살하지 않았다. 그는 만국 공법을 따라야 의병들도 정규군으로 대접받고, 한국 역시 독립국의 지위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1909년 초, 안중근은 노보키예프스키에서 같은 뜻을 가진 11명의 동지와 함께 동의단지회를 결성, 왼손 넷째 손가락 한 마디를 끊어 혈서로 결의를 다졌다. 이들은 피로 태극기 앞면에 ‘대한독립’ 네 글자를 쓰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하늘과 땅에 결심을 맹세했다.

이토 히로부미 암살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과 회담을 위해 하얼빈에 왔을 때, 이 소식을 듣게 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자원했다. 안중근은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에 도착하여 회담을 끝낸 후 돌아가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였다. 우덕순, 조도선은 차이자거우 역에서, 안중근은 하얼빈 역에서 총격을 준비하였고,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 저격 후 안중근은 “코레아 우라!”라고 크게 3번 외쳤다. 이는 "대한 독립 만세!"라는 뜻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피격 이후 열차로 옮겨져 사망하였고, 안중근은 러시아군에 체포되어 하얼빈 일본청영사관에 넘겨졌다.

뤼순 감옥에서의 재판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총격하면 세계의 이목이 쏠릴 것임을 알고 있었고, 이 기회에 세계에 대한제국이 일본에 외교권을 빼앗긴 것을 널리 알리고 싶었다. 그는 국제법에 의해 자신을 처벌해 달라고 주장하였고, 처음에는 외국인 및 한인 변호사의 변론이 허가될 예정이었다. 안중근 의사의 재판 소식을 듣게 된 국내외에서는 그의 재판을 위한 모금이 진행되었고,  모금한 돈으로 영국인 변호사 더글라스와 계약을 체결되었으며 한인 변호사 안병찬과 변영만이 변호사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대신 일본인 관선 변호사인 미즈노 기치타로와 가마다 세이지만 재판에 참여하게 하였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은 정치적 이유이며 전쟁 포로 신분으로 재판받기를 지속해서 주장하였지만, 일본 국내법에 의해 사형 선고 받고 1910년 3월 처형되었다.

 

안중근은 감옥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첫 번째, 대한제국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두 번째, 1905년 11월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 죄
세 번째, 1907년 정미 7 조약을 강제로 맺게 한 죄
네 번째, 고종황제를 폐위한 죄
다섯 번째, 군대를 해산시킨 죄
여섯 번째,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한 죄
일곱 번째, 한국인의 권리를 박탈한 죄
여덟 번째, 한국의 교과서를 불태운 죄
아홉 번째, 한국인들을 신문에 기여하지 못하게 한 죄
열 번째, 제일은행 은행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열한 번째, 한국이 300만 영국 파운드의 빚을 지게 한 죄
열두 번째,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열세 번째,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정책을 호도한 죄
열네 번째, 일본 천황의 아버지 고메이 천황을 죽인 죄
열다섯 번째, 일본과 세계를 속인 죄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

수감 중 안중근은 옥중에서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을 집필하였고, <동양평화론>을 집필하던 중 완성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동양 평화론은 안중근이 중요시했던 평화에 대한 주장이 담겨있다.


1. 일본은 뤼순을 청나라에 돌려주고, 한, 중, 일 3국 공동 관리 군항을 만들어야 한다.
2. 3국 대표를 그곳에 파견하여 동양 평화회의를 조직하고, 세 나라의 청년들이 평화군을 만들고 이들은 2개 국어 이상의 언어를 배워 서로 소통해야 한다.
3. 동북아 3국 공동은행을 만들고, 공동 화폐를 사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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