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히 조여 오는 서양 강국들의 압박
조선에서는 강국이라고 생각했던 청나라의 수도를 서양이 점령했다는 소식과 일본 역시 미국에 의해 나라의 문을 열었다는 소식에 놀라게 되었다. 베트남 등 동아시아의 다른 나라들 역시 서양 강대국(영국, 미국, 프랑스 등)에 의해 개항하였다. 그즈음 조선의 바다에도 낯선 모양의 배가 나타나고, 사람들은 이를 일컬어 ‘이양선(조선의 배와 모양이 다른 배)’이라고 불렀다. 이양선에는 서양인들이 무역하고자 하는 물건들을 가득 싣고 개항을 요구했다.
흥선대원군의 정치
한편 조선 내에서는 세도 정치에 의해 나라가 어지러운 사이, 열두살의 나이로 고종이 왕위에 올랐다.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고종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당시 권력을 갖고 있던 안동 김 씨 등 부패한 관리들을 몰아내고, 양반도 군포(군대에 가는 대신 나라에 세금으로 내던 옷감)를 내게 하면서 기세등등하던 양반들의 권력을 무력화시켰다.
양반들에게 고통받던 일반 백성들은 흥선대원군의 정치를 반겼으나, 흥선대원군이 임진왜란 시 소실되었던 경복궁을 다시 짓기 위해 백성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하면서 고통을 받기 시작하였다.
병인양요와 통상수교 거부정책
흥선대원군과 여러 유학자는 우리 고유의 문화를 지키기 위해 나라 문을 열지 않았고, 서양의 종교라는 이유로 프랑스인 선교사들과 천주교인들을 탄압하였다. 이에 프랑스가 1866년 강화도를 침략하고 강화성을 점령한 ‘병인양요’가 일어나게 되었다. 하지만 천주교 탄압에 맞선 이유 외에도 프랑스는 조선과 교역을 하면서 자신들의 영향권 하에 두고자 하였다. 정족산성 전투에서 양헌수 장군이 크게 프랑스를 이기게 되었지만, 프랑스는 후퇴하면서 여러 백성을 죽이고 외규장각(왕실 도서관)에 있던 책을 약탈하였다.
외규장각 의궤, 박병선 박사의 활약
빼앗겼던 외규장각 의궤 297권은 2011년 박병선 박사에 의해 우리나라에 다시 돌아왔다. 박병선 박사는 전라북도 전주 출신으로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벨기에 루뱅 가톨릭 대학교, 프랑스 파리 제7대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한국에서 프랑스 유학 비자를 받은 최초의 여성이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사서로 일하면서 프랑스 국립도서관 내에 방치된 직지심체요절을 발견하여, 직지심체요절이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인 것을 밝혀냈다. 또한 프랑스 국립도서관 베르사유 별관 창고에서 ‘외규장각 의궤’를 발견하였고, 수년의 연구 끝에 <조선조의 의궤>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박병선 박사는 외규장각 의궤를 한국으로 반환하기 위한 운동을 펼쳤고, 2011년 145년 만에 프랑스에서 의궤를 돌려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의궤는 국가의 중요 행사, 의식 및 여러 사업에 대한 내용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해 놓은 책이다. 그 중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는 영조와 정순왕후의 결혼식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친영반차도’는 영조가 정순왕후를 궁으로 데리고 가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신미양요
1866년(고종 3년), 미국의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평양에 도착했다. 이들은 무역을 제안했지만 대원군의 통상수교 거부정책을 따르는 평양 감사 박규수는 제너럴셔먼호에 퇴각을 요구하였고, 이를 거절하자 제너럴셔먼호를 대동강에서 불태웠다. 이를 핑계 삼아 1871년 미국은 조선에 무역을 요구하며 강화도로 쳐들어왔고, 이를 ‘신미양요’라고 한다. 조선은 계속하여 미군의 교섭 요청을 거절하였고, 결국 미국은 성과 없이 돌아가게 된다. 이후 흥선대원군은 한양의 종로와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오랑캐와 같은 서양 세력과 교류하지 않겠다는 통상수교거부정책을 강화하였다.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
1875년 9월 20일, 일본의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 앞바다에 나타났다. 이들은 조선 해안을 측정하기 위함이라는 핑계로 서해안을 따라 강화 해협을 침범했고, 이에 조선의 군사들이 배를 향해 대포를 쏘았다. 일본 군함은 대포를 쏘며 초지진 포대를 무너뜨린 뒤, 영종진(현재의 영종도)에서 조선 사람들을 죽이거나 약탈하고 관청을 불태웠다. 이후 단지 먹을 물이 필요해 강화도에 간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며 이 사건의 책임이 조선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일본은 조선에 개항을 요구했고 1876년 강화도에서 강화도 조약을 맺고 개항하게 되었다. 이것은 미국을 비롯한 서양 세력이 일본에 죄를 뒤집어씌운 뒤 강제로 조약을 맺은 방법을 그대로 써먹은 것이다.
강화도 조약은 일본에만 유리한 불평등 조약으로, 이것이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는 발판이 되었다. 조선이 자주국이라는 내용 역시 청나라가 조선을 넘보지 못하게 하는 꼼수였으며, 이 불평등 조약으로 인해 조선은 청나라의 주도로 미국과 통상 조약을 체결하고(1882년), 이어 러시아, 독일, 영국 등 다른 나라들과 조약을 맺게 되었다.
강화도 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은 부산과 원산과 인천 항구를 20개월 이내에 개항한다.
둘째, 치외 법권을 인정하여, 개항장에서 일본인의 범죄가 발생할 경우 일본인은 일본인의 법률에 따라 처벌된다.
셋째, 조선의 연안 측량을 자유롭게 한다.
넷째, 조선과 일본 양국은 수시로 외교 사절을 파견하고 일본 화폐의 통용과 무관세 무역을 인정한다.
개화정책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개화 정책을 펼치고 싶었던 고종은 일본에 수신사라는 사절단을 보내 일본의 개화 후 모습과 신식 무기들을 살펴보게 하였다. 김기수가 중심이 된 1차 수신사는 별다른 성과 없이 돌아왔으나, 김홍집이 중심이 된 2차 수신사는 돌아와 개화 정책 담당 관리가 되었다. 개화파 관리들은 통리기무아문이라는 개화 담당 부서를 만들고 그 아래 12사를 두었다. 이들은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만들었는데, 별기군은 양반 자제들로 구성되었다. 이후 조선은 조사 시찰단을 일본에 4개월간 파견하여 더 전문적 지식을 배우고 조선에 적용했다. 고종은 청나라에도 김윤식을 비롯한 관료들을 보내 신기술을 배워오도록 하였다. 청나라 사절단은 근대 무기 제조 기술 및 군사 훈련법을 배워 최초의 근대식 무기 공장을 설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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